화료! 일본 리치마작 <제1장 리치마작의 탄생 ①>

1910년 나가와 히코사쿠(名川彦作)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처음 들여온 마작패. 일본 마작박물관 소장.(사진: 일본 카루타문화관 홈페이지)


1910년 일본에 첫 마작패 상륙


과거나 현재나 마작의 유래에 대한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습니다. 다만 중국 학계는 최근 들어 여러 논문과 고증을 통해 근대 마작이 19세기 중반 절강성(浙江省, 저장성)의 항구 도시 영파(寧波, 닝보)에서 창안되고 상해, 남경, 항주 일대에서 제반 규칙이 정립됐다는 학설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이러한 근대 마작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약 반세기 후인 1894년 갑오경장 전후의 일입니다. 이것은 이미 1870년 이전부터 거리가 훨씬 먼 뉴욕, 로스엔젤레스, 런던, 베를린, 파리 등 미국과 유럽의 대도시에서 마작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을 감안하면 다소 늦은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청나라의 사신들과 상인들을 통해 들어온 마작은 배우기 어렵고 한 판을 끝내는데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리는 등 여러 원인으로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했습니다. 외국의 신문물에 관심이 많은 실학파 학자들과 양반 일부를 제외하고 이 ‘청마작(淸麻雀)’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역사적인 이유로 다양한 세계의 마작 문화가 공존하는 마작의 종합세트장 같은 곳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상해마작·홍콩마작·연변마작·대만마작 등 중국의 대표적인 지역의 마작, 미국 마작, 유럽 마작, 일본 리치마작, ‘3작마작’이라 불리는 한국 마작 등 거의 모든 종류의 마작들이 백가쟁명식으로 저마다 고유한 목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대 마작이 일본에 전파된 것은 우리보다 약 16년 후, 즉 20세기 초반인 1910년의 일입니다. 이처럼 마작이 일본에 늦게 전래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603년부터 1868년까지 260년 이상 일본을 통치했던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과 1894년부터 1895년까지 벌어졌던 청일전쟁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두 사건의 여파로 청나라와 일본 사이 민간의 왕래가 오랜 기간 단절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식적인 기록은 없지만 1910년 이전에 중국에서 마작을 접한 일본인들이 있었다는 복수의 주장이 존재합니다. 그중에서 1845년 상해 조계지에 영국 총영사관이 최초로 설치되고 미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에 이어 1872년 일본 총영사관이 설치된 것을 감안할 때 최소한 1872년부터 상해에서 마작의 존재를 인지한 일군의 일본인들이 있을 수 있다는 추론은 꽤 합리적입니다.
당시 상해 조계지에 있던 각국 외교관들의 사교 현장에서 마작은 빠질 수 없는 최신 유행 놀이였고, 아편에 취해 있던 구대륙에서 이익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가져가려는 무역상들의 착취 리스트에 비단, 홍차(紅茶) 등과 함께 상아, 호랑이 뼈 등으로 제작된 마작 세트는 최상위에 위치한 품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근거리에 일본의 외교관들과 상인들도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중국 마작세트. 1872년 또는 1873년 미국인 조지 글로버(George Glover)가 미국으로 수입. 두 세트 패들의 도안이 미세하게 다름.(사진: 일본 카루타문화관 홈페이지)


『일본마작 100년사』, <마작계(麻雀界)> 등 일본의 공신력 있는 문헌에 의하면 나가와 히코사쿠(名川彦作)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처음 마작패를 가져온 것은 1910년 1월의 일입니다. 1874년 6월 1일 니가타현 조에쓰시(上越市)에서 태어난 그는 1901년 7월 도쿄대학교 영문과 졸업 후 돗토리현 제일중학교를 거쳐 오사카 팔미중학교(八尾中學校, 야오츄갓코)에서 교사 생활을 했습니다.
나가와 히코사쿠는 대학생 시절 같은 학과 선배인 그 유명한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교류하며 그에게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한 소설가로 그의 초상화가 과거 수십 년 동안 일본의 대표적인 유통 화폐인 천엔 지폐에 등장해 우리에게도 상당히 익숙한 인물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마작의 존재를 일본에 처음 글로 소개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1909년 11월 19일 아사히신문에 기고한 만주와 조선을 주제로 한 기행문 <만주와 조선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에서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중국의 세계적인 신문물인 마작의 존재를 독자들에게 인상 깊게 소개했습니다.
오사카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나가와 히코사쿠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 있는 자주사범학당(資州師範学堂)의 영어 교사로 초빙되어 1905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약 5년 동안 머물다 1910년 1월 일본 도쿄의 본가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나가와 히코사쿠의 짐 속에 중국산 최신 마작세트 한 벌이 있었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입된 최초의 마작패입니다.
일본에 돌아온 나가와 히코사쿠는 1912년 사할린(樺太, 가라후토)의 오도마리중학교(大泊中学校, 대박중학교, 오도마리츄갓코)로 발령받아 교감으로 부임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에게 마작을 가르쳤습니다. 그가 중국 어느 지역의 규칙으로 마작을 가르쳤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마작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기록상 최초의 일본인 마작 강사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편 나가와 히코사쿠가 1905년 중국 운남성(雲南省) 또는 상해의 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1909년 일본으로 귀국했다는 주장이 그동안 일본 마작계의 유력한 학설이었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입니다. 이는 착각 혹은 양력과 음력 사이의 불일치에서 온 오류인 것 같은데 심지어 나가와 히코사쿠가 일본으로 돌아온 해가 1908년이나 1911년이라는 번지수가 매우 잘못된 주장도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마작연맹 10대 이사장을 지낸 테즈카 하루오(手塚晴雄)는 1989년 발간된 그의 저서 『남와북가(南は北か)』에서 (1950년에 작고한) 나가와 히코사쿠의 유족들을 만나 나가와 히코사쿠가 정확히 1910년 1월에 귀국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직접 들었다는 사실을 기록했습니다. 테즈카 하루오는 1959년부터 1993년까지 무려 34년 동안 일본마작연맹의 이사장 직을 수행할 정도로 일본 마작계에서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 같은 기록은 나쓰메 소세키가 아사히신문에 마작의 존재를 일본에 처음 소개한 것이 1909년 11월 19일이었고 약 두 달 후인 1910년 1월에 나가와 히코사쿠가 마작을 가지고 귀국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선후가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1909년 1월에 나가와 히코사쿠가 귀국했다면 나쓰메 소세키가 10개월 후에 마작이라는 존재를 굳이 소개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테즈카 하루오에 앞서 일본마작연맹 9대 이사장을 지낸 카와사키 비히로(川崎備寛)가 <마작타임즈>에 발표한 글은 그 어느 문헌에 있는 나가와 히코사쿠의 기록보다 상세하고 치밀합니다. 그는 도쿄의 스기나미쿠(杉並区, 삼병구)에 살고 있던 니가와 히코사쿠의 유족들을 찾아가 생몰 일시, 출신 학교, 일본과 중국에서 교사로 부임했던 학교 등 니가와 히코사쿠의 전 생애에 걸친 얼개를 정확히 기술했습니다.
카와사키 비히로의 기록이 아니었다면 니가와 히코사쿠를 초청했던 중국 사천성의 학교가 자주사범학당(資州師範学堂)이었다는 사실은 영원히 역사에 묻혔을 것입니다. 또한 상당수의 사람들이 니가와 히코사쿠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도 1910년 1월이 아닌 1909년으로 여전히 오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일본마작연맹 이사장들의 기록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도 존재합니다. 니가와 히코사쿠가 중국에서 가져온 마작세트가 중국 전역에서 1910년 연초부터 판매됐다는 사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중국에서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1909년에 귀국했다면 팔지도 않은 패를 살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 마작의 여명기


니가와 히코사쿠처럼 중국에서 직접 마작을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 의해 1912년 무렵부터 도쿄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서서히 마작이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마작을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통일된 규칙이 없고 심지어 참고할만한 중국어 교본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작 규칙은 중국을 방문하거나 체류한 지역에 따라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같이 통일된 규칙이 없다는 것은 마작이 가진 원초적인 문제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마작의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최초의 마작이라고 할 수 있는 상해마작이 광주, 홍콩, 북경, 청도, 중경, 서안 등 중국의 주요 도시로 전파되면서 마작의 원형에서 벗어난 수많은 변형된 규칙들이 속속 양산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중국에서조차 마작 규칙을 통일한다는 것은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중국어로 된 마작 교재 역시 당시 일본에서는 그 존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고 언제 발간될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참고로 중국에서 최초의 마작 교본인 『회도마작패보(繪圖麻雀牌譜)』가 발간된 것은 1914년입니다.
상해 출신으로 추정되는 심일범(沈一帆)이 편찬한 이 책은 총 58면으로 마작의 규칙과 각종 역(役, 야쿠. 청단, 홍단 등 우리나라 화투의 약과 같은 개념)을 글과 그림으로 설명한 마작사의 ‘창세기’ 같은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 책의 존재가 실제로 확인되어 대중들에게 발표된 것은 먼 훗날인 2003년의 일입니다.

상해유예사(上海游藝社)가 발행한 1924년 판 『회도마작패보(繪圖麻雀牌譜)』.


1917년 드디어 일본인이 쓴 최초의 일본어 마작 규칙서 『마작상해(麻雀詳解)』가 탄생했습니다. 다만, 이름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쇼칸세이(肖閑生)가 쓴 이 의미 있는 책은 일본이 아닌 중국 상해에서 출판됐습니다.

최초의 일본어 마작 규칙서 『마작상해(麻雀詳解)』. 일본 마작박물관 소장.


이듬해인 1918년, 역시 상해에서 무역상 겸 번역가인 이노우에 코바이(井上紅梅)는 자신이 창간한 중국의 다양한 문화를 소개하는 잡지 <지나풍속(支那風俗)>에서 마작의 규칙을 소개하는 글을 일본어로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작의 규칙을 자세히 설명했다고 평가받는 그의 마작 입문서는 1921년까지 <지나풍속>에 연재됐습니다. 이노우에 코바이의 본명은 이노우에 스스무(井上進)로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 노신(魯迅)의 『아큐정전(阿Q正傳)』을 1932년 11월 일본어로 최초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쇼칸세이의 『마작상해』와 이노우에 코바이의 마작 입문서는 일본 마작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의미 있는 역작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과 너무 먼 상해에서 출판돼 그 당시에는 일본 내 마작 보급화에 거의 도움을 줄 수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건 북경, 천진, 대련 등 중국의 다른 도시에서 출간된 몇 권의 일본어 마작 입문서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편 당시 상해에는 일본어로 쓰여진 ‘조선 마작 입문서’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 마작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1910년부터 1923년까지 마작의 매력에 매료되어 마작을 배운 사람들은 주로 문인들과 상류층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클럽’이나 ‘살롱’에서 마작을 배웠는데 그중에서 카쿠 토시오(賀来敏夫)가 1918년부터 도쿄 아카사카에서 문을 열었던 살롱 ‘작선회(雀仙会)’, 마츠야마 쇼조(松山省三) 부부가 1923년부터 도쿄 신주쿠에서 운영했던 카페 ‘프란탄(プランタン, 쁘렝땅. 프랑스어 Printemps로 계절 ‘봄’)’ 등이 대표적인 곳입니다.
특히 프란탄은 주인 부부의 직업이 남편은 서양화가, 부인은 배우라 당대를 풍미한 예술가, 연기자, 문인, 무역상 등이 이곳에 문전성시를 이루면서 상당수가 마작을 즐겼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많은 아마추어 마작 강사들을 배출했는데 이들이 점차 일본 마작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작 전문가들은 특별히 이 시기를 ‘프란탄 시대’라고 지칭합니다.
카페 프란탄 못지 않게 마작인들을 양성한 의외의 무대가 또 한 곳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해운회사 ‘일본우선(日本郵船)’의 국제 여객선입니다. 이 회사는 오랜 시간을 배에서 무료하게 보내야 하는 여행자들을 위해 1921년부터 선실에 마작패와 영문 규칙 팸플릿을 비치해 마작 대중화에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오사카, 고베 등 관서(關西, 간사이) 지방을 대표하는 항구 도시에서 마작 붐이 가장 먼저 일어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다만 10면 미만이었던 이 영문 팸플릿의 출처가 불분명하고 내용도 틀린 부분이 많아 상당 기간 일본 마작인들 사이에서 시빗거리가 됐습니다. 카페 프란탄에서도 이 팸플릿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는 등 마작 규칙을 서둘러 통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마작패 섞는 소리와 함께 점점 높아졌습니다.
한편 최초의 영문 마작책은 미국인 조셉 밥콕(Joseph P. Babcock)이 1920년 9월 발간한 『Babcock’s Rules for Mah-Jongg』입니다. 이 책은 표지가 빨간색이라 ‘레드 북(The Red Book of Rules)’이란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조셉밥콕은 미국에서 중국산 마작세트를 판매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무역상입니다. 조셉 밥콕의 레드 북은 마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상해마작의 규칙을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의 책은 나름대로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만 상해마작의 원형을 어느 정도 정확히 재현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상해마작을 집대성한 그 또는 그들이 최초의 매뉴얼을 역사에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조셉 밥콕은 그가 판매하는 마작세트에 소비자들을 위해 그가 저술한 마작 입문서를 요약한 팸플릿을 첨부했습니다. 이 팸플릿이 고급 마작세트와 함께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로 퍼져 마작의 세계화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다만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듯이 정품 마작세트가 날개 돋친 듯 팔리면서 이를 모방한 싸구려 마작 세트와 그 안에 첨부된 엉터리 마작 팸플릿도 세계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일본우선의 선실에 있던 문제의 마작 팸플릿도 바로 이 부류에 속합니다.

1920년 발간된 최초의 영문 마작 입문서 『Babcock’s Rules for Mah-Jongg』.


1929년 4월 ‘레인보우 회의’에서 ‘일본표준마작’ 제정


1924년 일본어로 된 최초의 마작 입문서들이 일본에서 출간되면서 드디어 마작의 대중화 시대가 개막됐습니다. 1924년 6월 기타노 리스케(北野利助)의 『마작 놀이방법(麻雀の遊び方)』, 7월 하야시 시게미츠(林茂光)의 『지나골패 마작(支那骨牌 麻雀)』이 연달아 발표되면서 일본에 정식 마작 규칙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지나골패 마작(支那骨牌 麻雀)』은 출간된 직후 베스트 셀러 반열에 올랐는데 초판이 10만 부가 넘게 팔렸다고 합니다. 한편 기타노 리스케(北野利助)의 『마작 놀이방법(麻雀の遊び方)』초판의 발간 시기가 1924년 6월이 아닌 8월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1924년 7월 발간된 최초의 마작 베스트 셀러 『지나골패 마작(支那骨牌 麻雀)』.

1929년 3월에 발간된 『마작 놀이방법(麻雀の遊び方)』 개정 2판.


이외에 1924년에는 마작사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는 두 가지 사건이 더 발생했습니다. 하나는 도쿄 시바(芝)에서 ‘미나미클럽(南々倶楽部)’이라는 이름의 마작 전문 클럽이 일본에서 처음으로 문을 연 것입니다. 1927년에는 역시 도쿄의 긴자에서 마작 전용 테이블을 갖춘 첫 마작장(麻雀荘) ‘남산장(南山荘)’이 개업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일본에 마작장이 우후죽순처럼 생겼는데 1929년에는 1,521개, 1930년에는 1,712개의 마작장이 영업을 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다른 하나는 지역의 명사와 유지들을 중심으로 한 마작 단체인 도쿄의 ‘도쿄마작회(東京麻雀會)’와 오사카의 ‘광진원 마작구락부(廣珍園 麻雀倶楽部)가 설립된 것입니다. 도쿄마작회는 1927년 ‘도쿄구락부(東京倶楽部)’를 거쳐 1929년 10월 1일 군소 마작 단체들을 통합해 전국 규모의 단체인 일본마작연맹(日本麻雀聯盟)으로 확대 출범했습니다.
광진원 마작구락부는 1927년 회원제 마작 클럽 제도를 도입해 마작 클럽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이 두 단체 설립 이후 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역 협회를 비롯한 전문 마작 단체들이 본격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인 1925년 오사카에서 마작 클럽 ‘일본마작구락부(日本麻雀倶楽部)’가 설립되어 1927년 ‘전관서마작연맹(全關西麻雀聯盟)’으로 발전했습니다. 같은 해 전관서마작연맹은 관서 지방의 마작 규칙을 통합한 <전관서마작연맹 표준마작 경기규칙(全關西麻雀聯盟 標準麻雀 競技規則>을 제정해 발표했습니다. 한편 전관서마작연맹은 1930년부터 기관지 성격의 잡지 <마작계(麻雀界)>를 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인 1925년 요코하마에서 ‘선작회(仙雀会)’가 결성되어 처음으로 지역에서 정식 마작 대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로부터 3년 후인 1928년 가을 오사카에서 오사카신문 주최로 일본 최초의 전국 마작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 대회는 예상을 크게 웃도는 약 400명 이상의 선수들이 출전해 그 열기가 대단히 뜨거웠습니다.
전관서마작연맹이 발족한 1927년, 스기우라 스에로(杉浦末郞)는 도쿄의 에바라(荏原)군 메구로(目黒)에서 마작 클럽 ‘서풍마작구락부(西風麻雀倶楽部)’를 설립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도쿄에서 마작 대중화의 선봉장, 일본 최초의 마작 전문 잡지 <마작춘추(麻雀春秋)>가 창간됐습니다. 이 시기에 나고야에서는 마작 강습소, 마작 용품점, 마작 전문 출판사 등이 대거 등장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서풍마작구락부는 조직을 확대해 1928년 ‘일본마작협회(日本麻雀協會)’로 새롭게 출발하고 이듬해인 1929년 마작 규칙을 통합해 ‘일본마작협회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일본마작협회는 이 규칙을 채택한 일본마작연맹과 합병 과정을 거쳐 1932년 ‘대일본마작연맹(大日本麻雀聯盟)’으로 새롭게 출범했습니다. 대일본마작연맹은 통상 일본마작연맹으로 호칭됐습니다.
한편 하타노 켄이치(波多野乾)는 마작 규칙을 정립할 목적으로 1929년 도쿄 긴자(銀座)에 마작 연구회 ‘은작회(銀雀會)’를 설립했습니다. 설립 직후 은작회는 ‘은작회 경기규정(銀雀會 競技規定)’을 제정했지만 호응이 별로 없어 이를 폐기하고 대신 1930년 일본마작연맹의 규칙을 채택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은작회 역시 1932년 ‘대일본마작연맹(大日本麻雀聯盟)’에 편입됐습니다.

이처럼 1920년대 중반, 오사카와 도쿄를 중심으로 광역 단위의 마작 협회가 구성되고 ‘클럽 마작’ 시대가 도래하면서 일본의 마작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협회, 연맹, 클럽, 강습소, 잡지사, 출판사 등의 규칙이 서로 달라 크고 작은 문제가 계속 발생했습니다.
특히 일본을 대표하는 두 도시인 도쿄와 오사카 사이 주도권을 둘러싼 미묘한 갈등과 알력은 마작 통일안을 마련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이것은 간토(關東)와 간사이(關西)로 상징되는 해묵은 지역감정 탓도 있지만 도쿄의 일본마작연맹 및 일본마작협회와 오사카의 전관서마작연맹이 마작의 규칙을 바라보는 시각이 사안별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승급(昇級) 및 승단(昇段) 기준과 “과연 어디까지 중국 마작 규칙을 준용해야 하는가?”의 문제였습니다.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마작 규칙을 통일해야 한다는 요구가 전국에서 빗발치는 가운데 1928년 3월 25일 도쿄구락부(일본마작연맹의 전신) 주최로 일본 최초의 ‘규정협정위원회’가 도쿄의 도쿄구락부에서 개최됐습니다. 여기에서 특별한 안을 확정하지는 못했지만 이 회의에 일본 각지의 대표적인 마작 단체들이 참여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비록 위원회는 성과 없이 끝났지만 이 위원회의 취지를 계승하자는 여론이 들끓으면서 ‘문예춘추사(文藝春秋社)’와 ‘국민신문사(国民新聞社)’의 주선으로 다시 두 번째 위원회가 소집됐습니다. 이듬해인 1929년 4월 11일 도쿄 마루노우치(丸の内)에 있는 식당 ‘레인보우’에서 전국의 주요 마작 협회 및 단체들이 참가한 마작 규칙 제정위원회가 다시 개최된 것입니다.
이 회의에서 일본 마작의 성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최초의 마작 규칙 통일안인 ‘일본마작 표준규칙’이 극적으로 제정되어 통과됐습니다. 이것을 회의가 개최된 식당의 이름을 따서 ‘레인보우 회의’라고 합니다. 의식(儀式, Ceremony)과 규범을 중요시하는 민족답게 마작이 도입된 지 20년 만에 여러 난관이 있었지만 마침내 전국적인 합의안을 도출한 것입니다.
이 표준규칙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①최저 부수 20후(符, 부) 확정 ②멘젠(門前, 문전) 시 10부 추가 ③만간(満貫, 만관) 최대 점수 500점 확정 등입니다. 만관(満貫)은 ‘돈꿰미’가 가득 찬다는 뜻으로 최대 한도의 점수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규칙들은 사실 일본표준마작의 독창적인 규칙이 아니라 최초의 마작인 ‘클래식 마작’이라 불리는 상해마작의 점수 계산 방법입니다. 따라서 일본표준마작의 의의는 최초가 아닌 전국적인 통일성에 그 방점이 있습니다.

1929년 4월 11일 열린 ‘레인보우 회의’.(일본 마작박물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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