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마작 제1강 <원조 마작에서 클래식 마장(麻將)으로> 1부
중국의 제2차 마작몽(麻雀夢)
1998년 중국체육총국은 마작의 세계화 및 대중화를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최초의 마작 통일 규칙인 ‘국가표준마장(国家标準麻將)’, 약칭 ‘국표마장(国标麻將)’을 발표했습니다. 중국에서 마작의 표준어는 마장(麻將, májiàng)입니다. 중국 정부는 이 국표마장을 통해 마작의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하고 마작을 바둑처럼 정식 스포츠 종목으로 편입해 적극적으로 세계에 보급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습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중국은 2005년 10월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헝가리 등과 ‘세계마작기구(World Mahjong Organization, 약칭 WMO)’를 결성했습니다. 북경에 본부를 둔 WMO는 이듬해인 2006년 9월 국표마장을 토대로 ‘마작경기규칙(Mahjong Competition Rules, 약칭 MCR)’을 제정해 발표했습니다. 이 MCR은 중국어, 영어, 일본어 등 3개 언어로 출간돼 전 세계에 배포됐습니다.
중국 주도의 세계마작기구는 일본이 참여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계화에 성공한 일본의 리치마작에 대응하기 위한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리치마작과의 상생과 공정한 경쟁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국의 속내는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기구의 강령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이를 번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규칙 체제는 보편적이고 과학적이며 우호적인 중국 마작문화를 통해 올림픽이 추구하는 정신 확산, 다양한 국가와 지역 간의 우정과 문화 교류 활성화, 문명화 및 표준화된 높은 수준의 고귀하고 예의 바른 마작대회 개최, 마작 동호인들의 기술 향상, 마작 문화의 무궁한 발전 도모 등의 목적을 위해 마련되었다.”
WMO는 북경 등 중국 내 주요 도시는 물론 대한민국의 제주도를 비롯한 세계의 여러 도시에서 선수권대회를 개최하는 등 국표마장의 ‘마작경기규칙’을 전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과 유럽 등에서 마작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중국의 마작문화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어서도 중국 내의 상황은 중국 정부가 기대한 대로는 전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여전히 중국 각 지역에서 국표마장 대신 과거 부모들이, 조부모들이 하던 방식 그대로 마작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각에서 마작이 가진 도박성을 지나치게 제한한 것이 국표마장을 멀리하는 가장 큰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지만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아무튼 2024년 현재 중국에서 국표마장을 통한 마작의 단일화는 아직은 요원한 일로 보입니다.

국표마장이 등장했지만 중국은 지역에 따라 마작의 규칙들이 여전히 들쑥날쑥한 것이 사실입니다. 수백 개 아니 최소 천 개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규칙이 존재한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이 수많은 규칙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중국 8대 요리보다 더 유명하다는 소위 중국 5대 마작이라고 불리는 상해(上海), 사천(四川), 광동(廣東), 북경(北京), 홍콩마작입니다.
이 5대 중국 마작 중에서 최초의 마작, 즉 원조 마작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상해마작입니다. 마작의 기원에 대해서는 설왕설래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상해마작이 마작의 출발선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중국 내부에서는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정도로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만 서양의 일부 학자들은 원조 마작이 상해마작이 아니고 광동마작일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상해마작과 광동마작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태동했다고 역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볼 때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다분히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홍콩마작의 경우 확실하게 순서상 상해마작 다음이라는 것이 동서양 학계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지금도 상해와 그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전역에서 성행하고 있는 상해마작은 초기 마작의 형식과 거의 흡사하거나 원형의 상당 부분이 고이 간직되어 있는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마작의 원형에서 생존을 위해 최소한으로 진화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 마작의 형태와 규칙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상해마작의 경우 최소한 19세기 후반 또는 20세기 초반의 규칙이 비교적 성공적으로 전승된 것으로 중국 학계는 파악하고 있습니다.
상해마작이 미국과 유럽에서 “중국 클래식 마작(Chinese Classical Mahjong)”으로 호칭되고 인류의 문화유산으로 대접받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무소불위의 ‘조커(Joker)’ 패(牌)를 도입해 어떤 패로도 쓸 수 있는 주류 미국 마작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상해마작과 결별했지만 전통을 중시하는 유럽의 경우 상해마작이 일본의 리치마작과 함께 여전히 마작 문화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 20세기 초반 중국 마작 문화의 세계화가 서구 열강들의 침탈의 결과로, 비록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 선두에는 상해마작이 있었던 것이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서양인들이 주도해서 중국 입장에서는 달갑지만은 않았던 중국의 제1차 마작몽(麻雀夢)의 주역은 바로 상해마작이었습니다.
양자강 동쪽 ‘영파, 상해, 남경, 항주’ 마작 기원설
마작의 기원은 무려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전설의 우(禹) 임금을 비롯해 대 유학자 공자, 수호지의 저자 시내암(施耐庵) 등 무수히 많은 유명인들이 그 창안자로 거론됩니다.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상해마작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동부 절강성(浙江省, 저장성) 해안의 항구 도시, 영파(寧波, 닝보) 출신의 ‘어문(魚門)’이라는 자(字)를 쓰던 진정약(陳政鑰)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고기 ‘魚’와 문 ‘門’이라는 한자가 마작의 약(約)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약은 우리 고스톱의 청단, 고도리 등과 같은 개념입니다. 마작에서 약은 난이도에 따라 점수가 높아집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역(役)이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Winning) Hands’, ‘Score’, ‘Points’ 등의 단어를 사용하고 ‘Yaku’라고도 합니다.
진정약(1817~1878)은 관리이자 학자로 19세기 중반 마조(馬弔), 골패(骨牌) 등 몇 가지의 중국 전통 놀이를 융합해 현대 마작을 정립 혹은 창안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東南西北 등 바람패와 春夏秋冬 등 꽃패를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전체 패의 수량을 확정하고 합리적으로 규칙을 마련해 ‘마작(麻雀)’이라고 명명하고 자신의 고향인 영파를 중심으로 이를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상하이 방언으로 ‘마췌(Máquè) 또는 ‘마충(Ma-Chong)’으로 발음되는 마작은 ‘삼밭의 참새’라는 뜻입니다. 왜 이름을 그렇게 호칭했는지 여러 가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력한 설이 마작패 섞는 소리가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와 흡사하다는 것과 마작 패를 완성하는 것이 참새를 잡는 것만큼 어렵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참새는 중국에서 매우 영리한 새로 여겨집니다.
- 한자 표기 및 중국어 발음 원칙
한자 표기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정체(正體)인 번체자(繁體字) 사용을 원칙으로 합니다. 한자의 발음은 우리나라식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중국어 병음 발음으로 표기할 필요가 있을 때는 중국 표준어인 만다린어를 기준으로 외래어 맞춤법을 준용합니다. 다만 부득이한 경우 일본식 간체자(簡體字), 용어, 발음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중국어 발음의 로마자 표기는 네이버 중국어사전을 참고합니다.
아쉽게도 당시 진정약이 확정한 마작의 규칙은 문서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마작이라는 이름이 왜, 언제 마장으로 변경됐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영파 지역을 중심으로 19세기 중후반부터 마작이 중국 전역으로 빠르게 전파된 것은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한편 영파 지방정부는 호수, 정원, 누각, 사당, 정자 등이 어우러져 주변이 수려하고 수십만 권의 고서적을 보관하고 있는 도서관, 천일각(天一閣)에 ‘마장 기원지 진열관’을 건립해 진정약을 기리는 동시에 영파가 마작의 기원지임을 대내외에 천명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많은 마작의 기원에 대한 가설 중에서 현재 가장 유력한 학설로 대두된 ‘영파, 상해, 남경, 항주’ 마작 기원설입니다. 참고로 영파를 기준으로 항주(杭州)는 약 150㎞,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는 상해는 약 220㎞, 남경(南京)은 약 420㎞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광활한 영토를 감안했을 때 이 정도의 거리는 가까운 편에 속합니다.
이 네 도시는 과거 춘추시대 때 5패(覇)를 구성한 오(吳)와 월(越)의 영토로, 초한(楚漢) 시대에는 항우의 근거지였던 강동(江東) 지역으로, 조조, 손책, 유비가 활약했던 삼국시대 때는 동오(東吳)로 불리던 유서 깊은 지역입니다. 이곳은 과거 중국에서는 드물게 3모작이 가능한 곳이라 오래전부터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상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5천 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남경(중국어로 ‘난징’)은 우리에게 익숙한 위, 촉, 오 등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의 수도였던 건업(建業)으로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남경은 또한 한나라, 송나라, 명나라 등 중국 6개 왕조의 수도였으며 한족의 뿌리이자 상징 같은 도시입니다. 청나라의 몰락이 시작된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조약’의 무대가 된 곳이기도 합니다.
이들 지역의 마작을 타지역의 마작과 구분하기 위해 ‘상해마작’이라고 합니다. ‘영파마작’이 아니고 상해마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상해가 중국 최대의 도시라는 상징성 때문이 아닐까? 감히 추측해 봅니다. 이 학설이 맞는다면 현대 마작의 역사는 까마득한 옛날이 아닌 19세기 중반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학설의 진위 여부를 떠나 실제로 마작 인구는 19세기 중반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바둑과 장기의 아성은 마작 패 앞에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마작이 삽시간에 중국의 국기(國技)로 자리 잡았습니다.
마작 패 섞는 소리와 참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중국 전역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가 우려를 표할 정도였던 마작의 대유행은 본질적으로 마작이 가진 ‘강렬한 재미’라는 요소 외에 서구열강의 중국 침략 및 그로 인한 강제적인 근대화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1839년 11월 3일, 중국과 영국 간 ‘아편전쟁(제1차 중영전쟁)’이 발발해 홍콩을 포함한 구룡반도 일원이 영국군에게 점령당했습니다. 이어 1842년 6월 상하이까지 점령한 영국군이 기세를 몰아 남경으로 진격하자 마침내 청나라는 백기를 들고 같은 해 8월 29일 영국과 ‘남경조약(南京條約, 난징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 결과 중국은 홍콩을 영국의 식민지로 할양하고 600만 달러를 보상금으로 지불했습니다. 또한 상해와 영파를 비롯해 광주(廣州), 하문(廈門), 복주(福州) 등 5개 도시를 무역항으로 개항했습니다. 이들 개항지에는 최혜국 특권을 부여받은 영국인들의 거주지인 조계(租界)가 설치돼 청나라 정부 대신 영국이 행정권과 경찰권을 행사했습니다.
특히 상해는 남경조약 체결 이후 일본과 미국까지 가세해 총 8개국이 조계를 설치하는 등 서구의 중국 침략의 전초 기지로 변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따라 그때까지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상해는 공동 조계를 통한 열강들의 공동 통치구역으로 변신하면서 하루아침에 세계 최대의 무역항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이처럼 남경조약 체결 이후 중국 최대의 교역 도시로 자리매김한 상해는 중국 각지는 물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서양의 문화와 공산품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상해는 서구화와 근대화가 동시에 빠르게 진행되면서 사실상 남경과 북경을 뛰어넘는 중국 제1의 도시로 도약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작은, 정확히 말해 상해마작은 남경조약으로 같은 시기에 개항된 광주와 홍콩이 속한 광동(廣東) 지역으로 가장 먼저 보급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아울러 서구의 신문물이 상해 등 개항 도시들로부터 중국 각지로 전파될 때 상해마작과 여기에서 변형된 광동마작이 함께 전해진 것으로 중국 학계는 추측하고 있습니다. 광동마작이 상해마작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규칙화된 정산표를 기준으로 기본 점수를 곱해 총 점수를 산출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해마작 이전의 불완전한 형태의 마작과 비슷한 놀이들 역시 남경조약 이후의 시기에도 중국 전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상당 기간 마작의 변종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108장의 카드로 하는 ‘마티아오(Ma-Tiao) 같은 게임이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청나라의 쇠퇴에 비례해 강제로 개항되는 청나라 도시의 숫자는 더욱 증가했으며 여기에 설치된 조계를 통해 중국의 마작패와 마작 문화가 19세기 말부터 서서히 미국과 유럽으로 건너가기 시작했습니다. 마작이 일본에 소개된 것은 공식적으로 1907년의 일입니다.
이처럼 19세기 중후반 장강(長江)이라고 불리는 양자강(揚子江, 양쯔강) 동쪽 지역에서 시작된 마작은 19세기 후반 양자강 남쪽의 광동지역에서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으며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마침내 수도인 북경까지 진출했습니다. 사천성, 운남성, 산서성, 길림성 등을 비롯한 중국 전역으로 마작이 널리 퍼진 것은 이보다 늦은 1920년 즈음의 일입니다.
마치며
마작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상해마작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1강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얘기가 길어졌네요. 2부에서는 상해마작이 서양에서 왜 클래식 마작으로 호칭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